날지 못하는 것은 운명이나, 날아오르려하지 않는 것은 타락이다 (06. 06. 10) 옛글모음(2006.05-2011.10)

책 이야기

이런저런 책을 읽었던 적이 있다. 널부러진 그 많은 시간을 감당하지 못하여, 하나에 집중하게 된 것이 책읽기 였다. 며칠동안 방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책을 읽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만났고, (그 책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김규항의 'B급좌파'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런저런 의문들은 나의 머릿속을 채워만 가고, 배설할 공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이 공간이다.

지적허영심에 '오바'한 책 몇권을 빼면, 나름대로 즐겼고 많이 배웠다. 독서광이나 책벌레들에게는 밝히기 창피할 정도로 일천한 독서량이겠지만, 그래도 나의 방 한 구석에 자리잡은 책장을 채워가며 읽는 재미는 제법 솔솔했다. 신문읽기 역시 또 다른 재미였다. 화려한 칼럼진들이 포진한 신문(진보적 목소리를 담는다던 그 신문)을 매일 아침 받아보는 것은 나를 설레게 했다. 홍세화, 진중권, 박노자, 손석춘 등이 그려낸 우리사회의 또 다른 모습은 그들의 글을 읽는 재미만큼 처량하고 불쌍했다. 

10대의 열정은 소진되고, 30대의 노련함은 채 갖추지 못한 20대 시절은 누구나 버겁다. 백지(白紙)와도 같아 무엇을 그리더라도 작품으로 완성될 수 있지만, '어떠한 것도 그릴 수 있다'는 말은 '아무것도 그릴 수 없다'는 말과 동일선상에 있다. 20대 시절은 그래서 피곤하고, 나른하다.

여느 20대와 같이 쳐져 있던 내가 큰 '위안'을 받았던 글이 있다. 그 글을 소개하고 싶어 거창하게 시작했다. 나는 가끔 이 칼럼을 읽어보곤 한다. 나태해졌을 때나 혹은 너무 지쳤을 때  이 글을 읽는다. 마지막 문단은 새로운 힘을 준다. 부디, 지금 이 순간 지쳐있는 20대가 있다면 이 글을 읽고 다시 한번 시작해보길 기대한다.



"날지 못하는 것은 운명이나, 날아오르려 하지 않는 것은 타락이다"

홍기돈 / 문학평론가


삶이 허무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1990년대 중반 즈음이다. 지저분한 현실이 변화할 조짐은 엿보이지 않았으며, 끈적끈적한 욕망의 찬미가 마치 진보인 양 문화계 전반을 화려하게 수놓을 때였다.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광장을 메우던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가 버렸나. 나침반처럼 방향을 지시하던 이념이란, 정녕, 한낱 자기최면에 불과했던 것일까. 욕망이란 하나의 덫처럼 우리를 옭아매는 그림자에 불과할 텐데 왜들 저렇게 그림자놀이에 심취하는 것일까.
아, 삶의 질서에 몸을 내맡기면 저렇게 삶에 중독될 수도 있구나, 라는 깨달음. 그로 인해 가능한 한 삶의 질서에서부터 가급적 멀리 떨어져 살고자 노력을 했고, 거기에서 죽음의 매혹을 느끼기도 했다. 당시의 심경이라면 잔잔한 호수의 표면처럼 펼쳐진 죽음을 향한 매혹 위에 중독된 삶의 깊이 없는 화려함이 어지럽게 번지는 양상이었다고나 할까. 인간의 삶을 생각할 때면 ‘저주받은 운명’이란 단어가 자연스럽게 떠오르곤 하던 때였다.
그렇게 몇 년을 허비하는 도중 발견한 것이 김영민의 ‘시작(詩作)과 시작(始作)-문화(文禍) 시대의 글쓰기’에 나오는 “날지 못하는 것은 운명이지만, 날아오르려 하지 않는 것은 타락이다”는 구절이었다. 만약 이 꽉 막힌 삶의 질서에도 헤쳐 나갈 하나의 탈출구가 존재한다면 ‘운명의 발견’과 ‘타락의 거부’ 사이에 놓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섬광처럼 스치던 놀라움. 순간 삶에 내재하는 그 팽팽한 긴장을 깊숙이 사랑스럽게 끌어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길이 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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